용서는 사랑인가? 사랑은 용서하는 것인가?
아니다. 용서는 사랑이 아니고, 사랑은 용서가 아니다.
용서는 사랑인가? -> 아니다.
사랑은 용서인가? -> 아니다. 절대로.
왜 사랑이 아닌가? 부정 긍정 논리로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용서는 부정을 긍정으로 만들 수 있을 때만 유효하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 마음에 가둬두고 있어서 차라리 용서하는게 내가 긍정이 되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은가? 차라리 악의로 살인한 자가 제거되어, 긍정이 되는 것을 바라자.
누군가는 잘못을 하고, 결국 용서받는다면, 잘못을 당한이가 용서를 한다면, 잘못이란 잘못은 다 하는게 낫지 않나? 결국 용서 받을것을 알고 말이다.
용서와 사랑이 답이라면,
이 잘못으로 누군가의 고통이 되어 괴롭고, 힘들고, 아프고, 미쳐버린다면 아무잘못 없을 이 존재는 무엇이 되고, 가장 잘못하고 쓰레기짓이란 쓰레기짓은 다 한 이년은 제거않고 용서해서 뭘 원하는 것인가? 재활용? 그럼 모든 혜택은 악한자가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이 논리는 맞지 않다.
용서 후, 결국 원하는 결과는 부정 존재가 -> 긍정 존재가 되어 함께 [같이 행복하게 잘 살자]인데, 부정 존재를 제거해서 없애냐, 부정 존재가 바뀌냐의 차이가 아닌가? 제거되는 과정이나 바뀌는 과정이 시간이라면 빨리되냐, 늦게 되냐의 차이.. 항상 긍정이 좋기에 빨리되어야 맞다. 즉 부정이 긍정으로 바뀌냐에만 오직 용서의 목적이 있는것이다.
쓰레기들인 악한 자들이 진실을 말하는 선한 자들을 쉽게도 육체를 살인하고 죽이고 누명을 씌우는데, 왜 선은 용서해야 하나?
이 정도면 용서는 단지 악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분명 그럴것이다.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면, 악이 50% 넘어가는 존재는 제거하는게 맞고, 그 전이면,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게 기회를 주는것이 맞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50%로 누군가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또한 문제가 되겠지만 젤 좋은건 부정이 아예 없으면 좋겠으나, 잘못한 걸 바로 알게 하는게 필요로 한듯 싶다.
어린 의뢰인과 같은 영화의 메세지처럼, 제대로 법적처리가 안되는것도, 쉽지 않을 방관자도.. 모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은 아무 문제가 없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억지스러운 결혼은 문제가 된다. 행복하지도 않을뿐더러, 쓰레기스럽고, 당신을 사랑으로 대하는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당신을 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생활이 결코 즐겁지 않음을 당신은 안다. 그들에게 가치 따위도 없다. 그냥 형식적인 관계일 뿐. 아마 육체적 유희나 즐기거나, 보여주기 식의 삶이거나, 남에게 보이는 것 나타나는 것을 중요히 하는 사람들이겠지.. 혹은 착한 사람이 이용당해 결혼한 관계라던지..
오히려 정확히, 감옥에 가서 뉘우치게 하고 두번다시 쓰레기짓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잊지 말자.
부모님이 때리는 매도 이렇게 2차 부정으로 -> 긍정을 만들기 위해 때리는 경우는 정말 사랑으로 때리는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잘못하지도 않은 아이를 때리거나, 감옥에 가게했다면, 그건 부모인 당신이 1차 부정을 일으키는 존재임을 잊지 말자.
#용서에 대해서,
내가 무엇을 상대에게 잘못하게 되었거나 했을 경우, 용서를 구하는 것이 옳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때, 그 용서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용서받는 상대가 긍정존재로 전환되는 것이다.
즉 용서를 해주는것도, 상대가 반성을 해야 의미가 있다. 형식적으로 용서를 구하는 이는 당신의 선함을 이용하는 부정존재에 불과하며, 이는 긍정존재로의 전환이 되지 않은것이다.
용서를 구하기 전에, 내 자신이 잘못을 뉘우치는것도 그러하다. 그리고 상대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본인이 잘못을 한 것이 명확하기에 용서를 구하는 것이 된다.
용서를 해주는 것은, 항상 옳지 않다.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한 건 절대 용서되서는 안된다. 결코 용서될 수 없고 용서해서도 안된다. 또한, 살인도 마찬가지다. 이는 용서될 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고통에 몰아놓고, 자녀를 잃거나 소중한 사람을 잃은 가족이나 사람들은 또 부정에 휩싸여 고통스러울 수 있다. 행복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것도 원치 않는, 누군가가 해를 가하고 피해를 주고 살인을 한, 아무 잘못없이 죽은것에 대해서 말이다.
크지 않은 것은 용서할 수 있을 수 있겠으나, 무거운것은 용서할 일이 아니다.
#100원을 훔치던, 100만원을 훔치던, 훔친건 훔친것이다.
100원은 상대적으로 가치가 가벼워 쉽게 용서받을 수 있지만, 남의 물건에 손을 댄 것 자체가 잘못이다. 훔쳤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액수는 그 다음이다.
하지만 병신쓰레기들은, 이게 상대적인걸 누구나 상식적으로 아는데, 쓰레기들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한다. 훔친애들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답은 아니다. 물론 그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두번다시 남의 것에 손을 대지 않았을 때 용서가 이뤄질 수 있다. 100원은 벌보다는 경고만 주겠지만..
거짓말하는 것을 계속해서 용서해주면,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드려 또 거짓말하는 경우도 그렇다. 절대 용서해선 안된다.
이들은 나중에 자신이 잘못을 하고도 용서만 구하면, 다시 용서를 받아주고, 해줌으로 써, 이런 일이 반복해서 일어날 경우, ‘내가 뭐 잘못하거나 거짓말해도 또 용서 구하면 되지’ 라며 가볍게 생각하기 시작하고, 이로 인해서 상대를 쉽게 이용해먹기 시작한다.
앞서 내가 아닌 내 자신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라고 말씀드렸다.
여기서 용서를 해도 피드백은 항상 있어야 한다.
용서를 했다 -> 용서를 구하지도 않은 쓰레기들에게 용서를 할 필요는 없다.
형식적으로 용서를 구했다 -> 용서하지 말 것.
진정으로 용서를 구했다 -> 사안이 용서할만한 것이면 용서할 것 (전쟁 같은 심히 무거운 범죄는 용서될 수 없다)
사실 잘못한 사람은 용서를 먼저 구해야 맞는것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나아가는게더 멋진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수준낮은 우리는 잘못을 숨기기에 가쁘다. 그리고 자신이 한 잘못이 아니라며 남탓하기에 이르른다.
용서를 해주어도, 부정을 저지르는 이가 여전히 반성할 마음이 없고, 부정을 긍정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이상, 용서는 큰 소용이 없다. 즉 다시 말해, 쓰레기는 그 용서해줌을 무기삼아 다시 기회를 노려서 다시 부정을 일으킬 것이다. 이들에게 용서를 한다는 것은 하나 마나이다. 즉 이들에게 용서가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지배행위가 기본 마인드인 쓰레기들
쓰레기들은 결국 보스?기질로 하나같이 자신이 누구에게 굴림당하거나 굴림하기를 원하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긍정 안에 부정이 있듯이, 악은 선 안에(혹은 아래) 두어야 한다.
즉 이런 바뀌지 않는 쓰레기 새끼들은 선에 굴림시켜야 한다.
쓰레기의 속성이 그러하다.
쓰레기들이 왕이 되면 세상은 더러워지며 악해지며, 병신같이 흐르고, 선한 사람들이 또는 결과적으로 모두가 고통을 받는다.
그래서 반대로 선이 리더로써 존재하지만, 긍정의 존재에게는 해당 되지 않으나, 변하지 않는 쓰레기적 속성을 가진 쓰레기들에게는 해당되게끔, 그들을 선 아래 굴림시켜놓아야 한다. 그들에게는 개념이 평등이라는 개념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딜을 해서 뭔가를 얻어 더 높은 권위를 얻고자 하는데, 아무리 높이 얻어도, 왕이 되게끔만 안되면 된다. 그들은 선의 무리에게 굴림함으로 어쩔 수 없이 힘의 논리에 따라 따를 수 밖에 없고, 최대한 부정의 짓 즉 악한 짓을 안하려 들것이다. 이들에게
그림을 보면 좀 더 이해가 쉬워질 것이다. 이 부분 또한 매우 중요하다.
그들의 인격체를 무시할 필요는 없지만, 부정에 대해서 부정은 철저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들이 바뀌도록 해도, 스스로 감동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두번다시 부정을 행하지 않고, 매사에 조심하며 자신을 향한 맘이 상대를 위하는 맘으로 바뀌어, 진정으로 자신이 상대에게 부정을 일으켰던 일에 용서를 구할 때, 그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굴림당해서 살아가게끔 해야 하하는 것이다.
사람은 차고로 쉽게 변하지 않는다. 언제까지? 자신 스스로가 변하기 전까지 말이다.
여러 번 생각해봐도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은, 상대와 대화를 해야 하고, 하지만 상대가 대화의 가치가 없다면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 관계는 거기까지인것이다. 언제까지? 그 쓰레기가 사람이 되어 있을 때까지.
변화의 대해서, 과거에 쓰레기였던 사람이 현재에 쓰레기라는 법은 사실 없다. 그도 경험과 삶을 통해 쓰레기짓을 하고 부정을 일으키며 살았더라도, 결국 뉘위치고 어리석은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을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또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나가고 있다면, 더 이상 쓰레기라고 보기 힘들다. 사실 모든 것은 현재를 기준으로 한다. 그들의 과거에 부정의 업보가 잘못된것은 맞고, 없어질 것은 아니지만, 그때와 다르다면 현재는 다르게 봐주어야 하는게 맞다. 하지만 당신은 분명 똑똑해져서 위하는 척 하는것인지, 정말로 위하는것인지 구분해야 한다. 그 존재의 말과 행동과 입밖으로 나오는 단어들을 통해서, 진심어린 사과인지, 거짓인지도 충분히 밝혀내야 한다. 즉 거짓(부정)과 진실(긍정)을 구별하라는 것이다. 철저히 구별해내야 한다.
용서를 했는데도 달라지지 않거나,
애초에 잘못을 하고도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건 잘못된것이다.
무조건적 용서.
주옥순, 자신의 딸이 성노예가 되도 용서한단다. 당신의 생각에는, 이년은 미친년인가? 정상인인가? 우리의 마음은 어느쪽을 향하는가? 정말 예수말대로 모든것을 용서해야 할까? 다시 복원시키거나, 그런일이 없던 것처럼 하는게 아닌이상, 모든게 보장된다면 모를까?
무조건적의 용서는, 늘 악한자들을 위한 최상의 핑계거리다. 이는 악한자들이 늘 착한 사람들 피해주고 고통을 가하고 악한 이들이 악한짓을 할 수 있게 하는 아주 기막힌 장치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천국에 간 예수 옆에 달린 십자가에 못박힌 존재도 마찬가지다. 이는 ‘나도 살인하고 천국가야지’ 라며 모든것이 정당화 될 것이다.
무조건적 용서는 악한 일만 키운다 = 잘못된 것 = 부정이다.
나는 악을 행한 이들이 용서가 되질 않는다.
나 또한 정의가 아닌 악이라면 선한 존재들을 위해 바로 제거되길 바랄뿐이다. 내가 하루 빨리 없어지는것이 선한 존재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항상 문제는 Q. 온갖 성폭력 및 강간 및 살인 등을 일으킨 자가, 용서받고 살아가야 하냐는 것이다.
수많은 여성 성폭행에 살인을 저지른 년들. 잡아다 거세했다 쳐도, 이미 고통받은 피해자들은 그 일로 이미 고통받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없어지지 않는다. 다시 묻는다. 어느 누가 고통을 좋아할까? 그 놈은 태어나니만 못한 놈년들이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올바름을 행하는데, 그것을 괴롭히고 망가뜨리고 함부로하고 고문을 가하고 고통을 가한 쓰레기 존재들,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나? 왜 악을행하는가. 그리고 그 악의 종이 되는가.... 왜 선이 고통받고 고문받고 하는 모든 악을 당함을 거쳐야 하는가?
+ 난 야훼 개가 그런 고통을 다 당하고 살았는지 궁금하네? 만들었다며 지구에 사람?
사랑은 용서하는 것인가? -> 아니다. -> 오직 변할 때만이 해당한다.
쓰레기들에게는 죄값을 받게하고 깨닫게 하는게 오히려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