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긍정과 부정의 논의
있다 = 존재한다 = 긍정 없다 = 존재하지 않는다 = 부정 |
여기서 말하는 [있다]와 [없다]는 가장 포괄적이며 원론적인 [긍정]과 [부정]이며, 스스로 있는 존재한 첫 에너지(존재)의 시작에 관한 아주 원천적인 부분을 최상위를 논의한다. 앞으로는 포괄적인 의미부터 세밀한 의미까지 모두 딱 [긍정]과 [부정] 두가지로 보고 이해하면 된다. 얼마든지 모든 것을 [긍정]과 [부정] 두가지로 모두 생각할 수 있고, 그 분류 과정에서 [긍정]과 [부정]을 구별하고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은 쉬운일이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원을 “존재한다”로 가정하자. 그리고 원이 있으면 말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이고, 원이 없으면 말 그대로 [무의 상태]이다.
그럼 무조건 존재하기 위한 시작은 있어야만 하는데,
- 존재하게 된 시작이 있기전, 그 시작 이전에 없음(부정)에 대해서 논의를 해야 하는지 = 무가 먼저냐,
- 혹은 그 시작이 태초부터 있음(긍정)에 대해서 논의를 해야 하는지 = 존재가 먼저냐,
- 그것도 아니면 “있음과 없음이 동시다”고 논의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처음에 말한 간단한 논리로 “긍정안에 부정이 존재한다”는 첫번째 사실에서 확장하여 [있다, 없다]의 근본의 “시작”에 관련하여 다시 [긍정]과 [부정]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게 바로 스스로 존재한 에너지(존재)의 <있다 vs 없다>의 원천적 논의이다. 이 부분으로 누구와도 싸우지 말아라 어느 누구도 정답이라 할 수 없으니까….
숫자로 표현하기를,
여기서, 있다 = 존재한다 = 긍정은 1 = 유 없다 = 존재하지 않는다 = 부정은 0 = 무 |
이라고 하겠다.
∞첫번째 사실: 긍정 안에 부정에 있다라는 말은 원천적 긍정인 1 안에 [ – 와 0 과 + ]가 있다는 말이다.
큰괄호인 존재하는 에너지 = { 원천적 긍정인 1 } 안에 { [ 부정– ]과 [ 0 ]과 [ 긍정+ ] }의 작은괄호가 있다는 말이다.
앞서 말했지만 원천적 에너지의 존재 유무와 첫번째 사실과는 명확한 구분을 지어야 한다. 또 “있다(긍정)”가 먼저냐, “없다(부정)”가 먼저냐 생각을 해보며 vs라는 단어를 썼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부정의 것 또한 존재하는 이유가 원천적 긍정이 먼저라서 그 안에 부정이 존재할 수 있다. 태초 이전을 얘기해보자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한 에너지(존재)와 아주 원천적인 근원을 얘기했을 때는 [무의 상태]인 [원천적 부정]이 먼전가? 라고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3가지의 가정으로 논의해보자.
1. 스스로 존재하기 전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가정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다 = 태초에 없다.] -> [스스로 존재한다. = 태초가 시작 됐다 = 태초가 있다.] 먼저를 [무의 상태]로 생각하기가 가장 쉬울 것 같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태. 스스로 어떠한 것도 존재하기 이전의 상태를 말이다. 태초가 있기전 없었다고 말하는게 우리 사람에겐 이해도 빠르고 맞는 말인것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원천적이고 최상위인 “무의 상태 = 없다”라는 [부정]이 먼저인가?
그림을 한가지 더 그려보자
이와 같이 그렸을 때, [무의 상태]에서 스스로 존재함에 있어서, 스스로 존재한 에너지는 영원하고 무한할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스스로 존재한 에너지(존재)는 자신이 최초이기에 왜 존재했는지도 의문일거고… 우리는 스스로 존재한 에너지로의 구성요소로 3차원이라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생활하며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글도 쓰는데… 또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 중 지구라는 곳에서 자연도 구경하고 물질도 활용하고 삶을 산다. 이 모든 것이 [무의 상태]에서 스스로 존재함에 생긴 것이라면, 스스로 존재한 에너지(존재)는 그 에너지의 일원인 우리가 감사하기 이전에 먼저 스스로 존재함에 감사해야 한다. 또 스스로 존재함에 우리도 함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영원한 긍정에 대한 아주 근본적인 에너지의 형태이자 반응이다.
2. 스스로 존재한 상태가 처음이라는 가정.
재미있다. “있음”이 먼저이고 애초에 “없다”는 배제되는 가정이다. “있다(긍정)”이 먼저이고 “없다(부정)”이 나중이라고 그림을 그리니 결과는 이렇다 = 스스로 존재했다 -> 스스로 자멸한다.
여기서 던지고 싶은 질문은, 스스로 존재함이 자멸함에 있어 스스로 존재한 에너지가 무한이 아닐까? 아니면 무의 상태가 영원하고 무한할까?
개인적으로는 내가 삶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데 있어서는 이 부분에 생각을 적용시키는 것 같다. 앞서 말한 아주 심플한 로직의 첫번째 사실이 아닌 원천을 논하고 있음을 명심해주길 바란다.
아무튼 [ 스스로 존재한 만큼 스스로 없어질 수도 있다 ] 라는 교훈을 남겨주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여기서도 한가지 그림을 더 그려보자.
스스로 존재한 상태가 처음이자 끝이라면? 아예 “없다(부정)”가(이) 없으면? 라는 질문도 던져본다.
3. 스스로 존재한 상태와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동시 가정
이건 아무리 봐도 말이 안되는 것 같다. 있음과 없음이 동시에 존재한다는건. 있거나 없거나 중 누가 먼저냐에 대해 위배된다. Vs의 결판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있으면 있는거고 없으면 없는것이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음… 뭐 동시에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할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 책을 읽고 있는 만큼 있는건 확실한데 없는건 무엇일까? 우리하고 관계가 있는것일까? 이 부분에 대한 논의도 여러분께 넘기겠다.
“있다” vs “없다” 에서 “누가 먼저냐” 에 대한 논의는.. 개인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맞다 할 수 없고 여기에 대해서는 답을 내릴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봐도 어렵다. 다시 생각해도 누가 먼저라고 우리는 말 할 수 없다. 그래서 추가적인 논의나 토론은 각자 알아서 하길 바란다.
4. [없다, 있다]의 끊임없는 연결사슬.
1번 가정과 2번 가정을 합쳐보자. 재미있다.
1번째 가정에서 [ 없다 -> 있다 ] + 2번째 가정의 [ 있다 -> 없다 ] = [ 없다 -> 있다 -> 없다 ]
혹은 [ 없다 -> 있다 -> 없다 -> 있다 ] 와 같이 4번째까지 나누어 봐도 좋고, 다 연결하여 무한대 적으로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다.
여기서 던지고 싶은 질문은, 태초 이전의 [무의 상태]에서 태초의 [스스로 존재한 에너지]가 나타났을 때 그 에너지가 영원하지 않아 스스로 자멸할까? 그런 후에 [무]도 영원하지 않고 다시 스스로 존재하는 에너지가 생길까? 역시나 논의의 몫은 여러분이다. 답을 개인적으로는 낼 수 없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원천적으로 태초 이전의 부정(없다)이던 시작이 있어 긍정(있다)이던, 설사 이후 스스로 자멸할 수 있기에 무의미 할 수도 있지만, 그 안에 의미를 가진다면 삶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야 겠다. 물론 나만의 행복이 아닌 모두의 행복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킬 선이 필요하다. 올바른 선에서 우리 모두가 올바름을 토론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주어진 에너지에 가능하면 부정없이 무의미보다는 감사하며 그 누구보다 서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결국 결론은 [있다 vs 없다]에서 누가 먼저인지 알 수 없지만.. 또 결론 내기가 난해하기에 어떻게 생각하든 여러분의 몫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과정을 생각함에 있어서 원천적인 것은 누가 먼저냐 내가 먼저냐 너가 먼저냐 이럴 수 없지만, 무엇보다 명확한건, 스스로 존재한 에너지 “있다”라는 [원천적 긍정] 자체로 부정(원천적아님)보다 긍정이 먼저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첫번째 사실이 적용되는 것이다.
아래 그림과 같이 우리는 긍정이 존재함에 부정이 포함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스스로 시작된 있다]라는 [존재하는 에너지]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원천적이며 포괄적인 것의 “있다”의 [긍정]과 “없다”의 [부정]의 아닌, “존재하는” 세밀한 [긍정]과 [부정]에 대한 사실을 탐구한다. 즉 스스로 존재한 에너지로부터의 사실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긍정]과 [부정]은 존재하고 있는 상태가 바탕이 되어 진행되는 내용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선 시작이 존재했던 에너지 혹은 존재 안에서 [긍정]과 [부정]을 다루게 된다. 그게 지금 우리들이 존재하는 이유니까….
그리고 부정의 것들(고통, 아픔, 질병, 화남, 죽음 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정이 존재한다는 것은 원천적 존재(=있다)하는 것에 부정이 존재하고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구도 싫어할 고통도 아예 무의 상태가 아닌 우리가 있고 나서 존재하는 것이다. 즉 존재 이후(=스스로 있다 이후)의 부정이다.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 사람들이나 존재들에게는 긍정과 부정이라 분명한 두가지 에너지가 있다. 또는 적용되어 있다.
우리가 사는 곳에 존재하는 에너지 = 긍정 에너지 + 부정 에너지
그리고, 이 에너지는 존재하는 원천적 긍정 아래 있다.
그 삶을 신이 주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이라는 부정새끼가 부정을 우리에게 일으킨다.라고 봐도 무방하다. 무신론자라면 스스로 존재한 에너지가 될 것이다. 과학이 말하는 빅뱅이든, 알 수 없는 힘이든 무엇으로 불러도 마찬가지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들은 삶에서 부정적인 것을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우리의 본성은 항상 긍정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아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영원히 존재하고 싶고, 또 죽음이 두려운 이유도 여기에 해당할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부정에서 스스로 존재해서 있는것=긍정에 스스로 감사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에너지가 존재하고 있다는건 아직 “영원함”이, “존재함”이라는 [원천적 긍정]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 이 세상에서 사람이 죽어도 지구는 존재한다)
[고마움 = 감사]는 주로 부정이 처리되었을 때 일어나는데, [ 없다 -> 있는 것 ] 또한 [ 부정에서 -> 긍정이 된 것 ]이라 이게 바로 범사에 감사해야할 가장 원천적인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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